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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지원][프로젝트지원]김태은_전기적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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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6.13 14:04:00 후속지원 2016-03-03 ~ 2016-03-12
대상 김태은(난지2기) 장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멜랑콜리의 주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사진작가 외젠 아제(Eugene Atget)는 대도시 파리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발품을 팔아서 찍은 이 '스트레이트'(straight) 사진 속에는 말 그대로 파리 곳곳의 모습이 정직하게 담겨있다. 그런데 벤야민의 지적처럼 이 진실한 광경을 담은 사진 속에는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생뚱맞게도 그의 사진이 너무나도 정직하게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현실에는 어떠한 이야기나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장소에 불과하다. 시끌벅적한 이야기와 치장이 제거되어 버린 현실의 사진 속의 이 공허한 도시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아제의 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진은 오히려 공허하고 낯선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제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느낀 감정은 공허함이라는 덧없는 감정 이외에 묘한 심미적 매혹감이다. 이 역설적인 감정을 '멜랑콜리'(mélancolie) 또는 '우울'(spleen)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멜랑콜리'는 현실의 덧없음에 대한 절망감과 동시에 그러한 덧없는 현실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복잡하고도 이중적인 감정이다.


김태은 작가가 작업을 통해서 보여주는 감수성은 한 마디로 이러한 '멜랑콜리'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멜랑콜리의 감수성은 이전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을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전시된 작품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새롭게 작업한 "주술적이거나 전기적인 저장장치'(2015)는 얼핏 보면 매우 엉뚱하고 심지어 장난감 같기도 한 공상적 장치처럼 여겨질 수 있다.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기차의 트랙이나 트랙 안에 있는 투명한 공과 같은 장치는 현실 공간이라기보다는 공상적인 토이랜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트랙을 무한 반복 회전하는 기차는 투명공이 공기압을 유지하여 형태를 보존하기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한편 투명공은 그 자체가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목적이다. 분명히 목적은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 목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다. 목적은 있지만 그 목적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무의미한 것일뿐더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들은 오히려 맹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드러내며, 이 역설적인 상황이야말로 공허한 현실 그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태은 작가의 작업이 매우 풍자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풍자를 넘어서 그 자체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들이 지닌 유사성을 발견한데서 착안한 것이다. 지역의 마스코트는 그 지역의 특수한 장소성을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를 획일성이 존재한다. 마치 서울시청을 포함하여 최근 전국 가지에 건축된 대규모 관공서 건축물이 획일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마스코트들에게서도 가족적 유사성이 나타난다. 작가는 이러한 획일화를 발생시키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다소 희화적인 방식으로 이 가족의 조상을 외계인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분명 이러한 힘은 존재하며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이 마스코트와 같은 현실적 성과를 일으키는 원천이자 목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목적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적인 대상과도 같다. 온갖 과학적 성과나 기술을 총괄한 건축물이나 마스코트가 만들어진 목적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주술적 대상을 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종교적인 맹목성인 셈이다. 과학과 종교는 맹목적인 관계를 통해서 서로 지탱한다. 작가 또한 맹목적이리만큼 무모하게 발품을 팔아서 직접 지역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들을 찾아 헤맨다. 아제가 그러하였듯이 현실의 공허함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에 묘한 미감적 희열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김태은 작가의 멜랑콜리적 감수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박영욱)




순환으로서의 세계 - 그것에 대한 기록과 지움에 관하여


김태은 작가가 지금까지 수행해 온 작업들을 보면 한 작가가 해낸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작업 방식은 주로 미디어 설치로 분류될 수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가 다루고 있는 내용과 소재 그리고 형식을 보면 매우 다채롭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의 작업이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업에서는 공통적인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주로 조형적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전에 대한 시각을 비롯한 감각적 인식의 방법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그의 작업들에서는 현실과 비현실 혹은 또 다른 현실들이 함께 나타내는 작업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대상 혹은 상상으로부터 만들어진 작업 결과물에 대해 그 결과물보다는 그것을 감각하는 프로세스를 노출시킴으로써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나 감각적 인식의 과정에 대한 작가적 시각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김태은 작가가 그의 작업에서 이처럼 작업 방식과 내용의 다양성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작가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의 작업 의 근간에 착시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작업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현실의 사물과 그것을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작업과정에서 ‘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재현한다’는 것과 같은 가장 근원적인 행위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고민해 왔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시각 혹은 감각적 인식이라는 본질적 질문으로부터 그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 가운데에는 공간을 만들고 허무는 행위가 반복되거나 빈번히 실상과 허상 혹은 교차되는 부분들이 발견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기표도 기의를 온전히 지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듯이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나 사물로 형상화 함으로서 대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허물어 내는 듯한 작업방식을 자주 보여준다. 예를 들어 “Left Cinema, Right Cinema”와 같은 작업에서는 스토리와 영상을 만들어내는 허구로서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특정 대상을 지워낸 빈 공간만을 드러내면서 장소와 공간이 만들어낸 환영에 대해 그 존재적 위치를 묻게 된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창작하는 행위는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특정 사물이나 상상으로부터 2차원의 이미지나 3차원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차원 변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환 과정에서는 정보의 손실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태은 작가의 작업은 ‘작가가 재현하고 표현하는 행위에는 가능성과 한계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작업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달리 보면 인간이 시각을 비롯한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라는 공간에서의 인지적 가능성과 한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아마도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계를 대상으로 작가로서 다양한 감각적 인식의 차원 변환을 시도함으로써 형상화 하고 동시에 그것을 허무는 행위를 계속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이 실제적 공간과 허상적 공간, 시각적 인식과 청각적 인식 등의 간극을 스스로 경험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경험적 간극과 관련하여 ‘Circling’ 용어를 통해 그가 해왔던 작업을 다시 바라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 대해 작가는 그의 미디어 설치 작업들이 일정한 궤도를 돌거나 주변을 반복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조형적 특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Pinwheel Urbanism’이라는 명제에 대해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 무한 반복의 원형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선형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순환적 세계관이며 그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시 주제인 ‘Circling’은 그의 순환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가 현전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태은 작가에게 있어서는 작업은 현실과 비현실 혹은 또 다른 현실들이 공간과 시간의 좌표에서 작가적 시각의 지평아래 순환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작가에게 있어서 조형행위라는 것 역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기표를 발생시키는 행위들이지만 그 기표는 기의를 향하는 것이자 기의를 향할 수 없음을 동시에 드러내는 방식이며, 작가는 이를 연결시킴으로써 작가의 순환적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업 중 일부에서 보여지는 장소특정적 작업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시간특정적 작업이 된다. 그러한 작업들은 공간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시간의 측면에서 한시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순환 가운데 이처럼 순간 순간의 괄호들을 그려냄으로써 그 순간들을 통해 거대한 시공간의 순환과 의미의 연계 시스템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태은 작가는 장소 그리고 시간을 특정화 하면서도 어떤 측면에서는 동시에 그 지점들을 허물어 버리는 지워내는 특이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인터렉티브 아트의 형식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즉 작가의 경험과 관객의 경험을 동질화시키지만 이내 그 경험의 맥락을 지워내고 무화(無化) 시키는 방식과도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렇게 주체와 타자,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무와 같은 극단의 간극에서 마치 궤도를 순환하는 위성처럼 서로 마주하며 돌고 있는 순환적 세계와 체계를 발견하였던 것 같다.

김태은 작가의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세계가 여러 번 리셋 (Reset)되었음을 듣게 되었던 것과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의미와 무의미, 지시와 지시 불가능, 현실과 비현실을 동시에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이들을 다시 리셋(Reset)시키는 행위를 순환이라는 맥락에서 반복시켜 보여줌으로써 그가 바라보는 세계상을 그려내고 또 지워내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태은 작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선형적이고 순환적인 사유의 배경 가운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감각을 다루고 있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이 작가가 그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작가적 태도이자 예술적 전제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